기 · 북쪽, 열 해

열 해 전, 여왕은 판을 놓고 이기면 떠나도 좋다고 말한다.

여왕의 조건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여왕의 조건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그 편지에 명령이 없었던 이유를, 그는 열 해 전 대전에서 들었다.

대전 한가운데 낮은 탁자가 놓였다. 시종들은 말 하나가 저절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바닥의 수평을 맞췄다.

탁자 위에는 여덟 줄씩 가로세로로 나눈 나무판과 두 무리의 말이 있었다. 흰 말은 강가의 밝은 목재로, 짙은 말은 오래 말린 나무로 깎았다. 모양은 왕, 신하, 코끼리, 말, 전차, 보병이었다. 새 나무와 밀랍 냄새가 향 연기 사이에서도 났다.

궁정의 목공 케샤바가 허리를 숙였다. 손가락 하나가 없었다. 젊어서 전차 바퀴를 만들다가 잃었다고 했다. 그는 남은 손가락으로 판의 네 귀를 차례로 눌렀다. 나무가 습기를 먹어 휘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보는 손길이었다.

“장군들의 모래판을 작게 옮겼습니다. 말이 움직일 길을 정해 두면, 누구든 같은 조건에서 생각을 겨룰 수 있습니다.”

다라세나가 전차 말을 들어 무게를 살폈다. 케샤바는 같은 종류의 말은 높이뿐 아니라 무게도 비슷하게 맞추었다고 했다.

“어느 지방의 규칙을 따른 것이냐?”

수바후가 묻자 케샤바는 판 가장자리를 쓸었다.

“한 지방 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상인들이 두는 법과 병영의 연습을 섞어 이 궁정에서 시험할 수 있게 줄였습니다. 오늘 정한 길도 불편하면 다음 판에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왕은 시험 중인 판을 아들에게 줄 새로운 과제로 삼았다.

“네가 이기면 떠나도 좋다.”

대전에 모인 대신들 사이에서 옷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재상 수바후는 왕자가 궁정을 떠난다는 말보다 후계자가 승부로 허락을 얻는다는 형식을 먼저 걱정했다.

“전하, 나라의 의무를 놀이에 걸 수는 없습니다.”

“의무를 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른 공부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여왕은 아린드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린드라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요?”

“네가 배우고 싶은 곳으로. 스승도, 공부할 책도 네가 고르거라. 내가 사람을 붙여 하루를 정하지 않겠다.”

그 말은 호위도 비용도 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여왕은 호위의 수와 여비는 국고가 정하되, 어느 스승 아래 얼마나 머물지는 아들이 정하게 하겠다고 분명히 했다. 수바후가 그 문장도 기록해야 한다는 듯 타라를 바라보았다.

대신 아린드라가 지면 앞으로 세 해 동안 여왕이 정한 군사 교육을 따르기로 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는 훈련장, 오후에는 군정 회의, 철마다 국경 순시였다. 아린드라는 판보다 어머니를 오래 보았다. 세 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왜 하는지 잊게 될까 두려웠다.

“제가 떠나 있는 동안 나라의 일이 생기면 연락을 주십시오.”

“어떤 일까지 말이냐. 창고 하나가 비어도? 국경에서 말 한 필을 빼앗겨도?”

“어머니께서 제가 여기 있다면 알게 하셨을 일은 모두요.”

“그 소식을 듣고 네가 돌아올지는 누가 정하지?”

아린드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떠날 자유를 얻고도 매번 어머니의 판단을 기다린다면 장소만 달라질 뿐이었다.

“자유를 달라면서 내 명령도 기다리겠다는 것이냐?”

“명령 말고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돌아올지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말을 하고 나니 무례함보다 책임이 먼저 느껴졌다. 여왕도 그 차이를 들은 듯 눈썹을 조금 내렸다.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부의 조건을 기록하라는 손짓을 했다. 타라가 갈대 펜을 들었다. 왕자의 조건까지 적으려 하자 재상 수바후가 손을 내밀었다.

“필요 없는 문장이다.”

“말씀하신 것은 적어야 합니다.”

타라가 조용히 말했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상은 손을 거두었다. 타라는 ‘소식을 보낸다’와 ‘돌아오라 명하지 않는다’를 나누어 적었다. 먹이 마르기 전에 수바후가 다시 읽어 보았지만 지울 곳을 찾지 못했다.

말의 길은 그 자리에서 하나씩 합의했다. 전차는 막히지 않은 곧은 길을 달리고, 말은 굽은 걸음을 뛰며, 신하는 왕 곁에서 짧게 움직이기로 했다. 다라세나는 북쪽 병영에서 코끼리를 다르게 움직였다고 말했다. 케샤바는 코끼리 말 밑에 새긴 표시를 보여 주며 이번 승부에서는 이 길을 쓰자고 했다. 타라는 다른 판의 규칙과 섞이지 않도록 ‘대전의 판’이라고 제목을 붙인 뒤 막힌 길과 말을 잡는 법까지 받아 적었다.

아린드라는 보병 하나를 끝줄까지 밀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케샤바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하지 않은 규칙은 승부 전에 정해야 합니다.”

여왕이 말했다.

끝에 닿은 보병은 잡힌 같은 편 말 가운데 하나로 바꿀 수 있다고 합의했다. 타라가 그것도 조건 아래에 적었다.

“사흘 뒤에 둔다.”

여왕은 짙은 왕을 집었다. 아린드라가 어릴 때부터 만지던 나무 인형보다 작았다.

“사흘이면 충분하겠느냐?”

“규칙을 배우기에는 충분합니다.”

“나를 이기기에도?”

아린드라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건 두어 봐야 압니다.”

여왕은 짙은 왕을 제자리에 놓았다. 말이 판에 닿는 소리가 작고 단단했다.

“연습 상대는 네가 구해라. 단, 내 수를 엿본 사람에게는 묻지 마라.”

“어머니도 연습하실 겁니까?”

“그것도 두어 보면 알겠지.”

그날 오후 소문이 장터까지 퍼졌다. 책벌레 왕자가 여왕에게 나라 밖으로 나갈 허락을 걸었다는 소문이었다. 주막에서는 누가 먼저 질지 돈을 걸었다. 여왕의 패배를 점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궁전에서는 타라와 수바후가 말의 수를 함께 세고 상자를 봉인했다. 승부 뒤에 어느 쪽도 바뀐 말을 탓하지 못하게 하는 절차였다.

케샤바는 빈 탁자를 닦다가 타라에게 말했다.

“말을 다 깎아 놓으니 사람이 하나 부족하구나.”

“무슨 사람요?”

“판 밖에서 말을 치우는 사람.”

“잡힌 말을 말합니까?”

“잡힌 것과 버린 것은 다르지. 두는 사람은 앞만 보느라 자기가 무엇을 없앴는지 잊을 수 있어.”

타라는 그 문장을 조건문 아래에 적었다. 아직은 어디에 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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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북쪽, 열 해

떠난 지 열 해째, 명령 없는 편지가 도착하고 왕자는 귀환길에 싸운다.

돌아오는 길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돌아오는 길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떠난 지 열 해째 되는 해, 명령이 없는 편지가 마가다에 닿았다.

여왕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아린드라는 약초를 씻고 있었다. 손을 닦지 못한 채 봉인을 뜯어 종이에 물이 번졌다. 북쪽 요새, 열두 마리의 코끼리, 확인되지 않은 생존자. 명령문은 없었으나 어느 문장도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야 의자에 앉았다.

편지를 가져온 역졸의 말에는 소금기 밴 땀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역졸은 두 번 말을 갈아탔고 마지막 나루에서는 군사들이 배를 먼저 가져갔다고 했다.

바수미트라는 짐을 싸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가려느냐?”

“예.”

대답은 빨랐지만 아린드라의 손은 편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떠날 때 어머니에게 나라의 소식을 달라고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제 소식을 받았으니 선택도 자신의 몫이었다. 돌아가면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남으면 편지의 빈칸에 들어갈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지 몰랐다.

“배움이 끝났느냐?”

아린드라는 젖은 편지를 접었다.

“가서 모르는 것을 만나겠습니다.”

바수미트라는 젖은 약초를 다시 물에 담갔다. 서둘러 말리면 뿌리가 갈라져 약효를 잃는다고, 아린드라가 어제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네가 없으면 이건 누가 건지지?”

아린드라는 옆에 선 어린 학생에게 시간을 일러 주었다. 스승은 그 대답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길 앞에서도 하던 일을 다른 손에 제대로 넘기는지 보려 한 것이었다.

그는 책 전부를 가져가지 않았다. 수로 장부의 사본, 약재 목록, 타라의 기록만 골랐다. 함께 공부하던 학생 둘이 의약품을 들고 따라나섰다. 스승은 빈 종이를 한 묶음 주었다.

“모르는 것을 만나면 이름부터 붙이려 들지 마라. 본 것과 짐작한 것을 나누어 적어라.”

아린드라는 어머니도 편지에서 그렇게 했다는 말을 삼켰다. 스승에게 절한 뒤 그는 답장을 역졸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품에 넣었다. 자신이 답이 되어 돌아가는 편이 빨랐다.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반대로 걸어왔다. 아이를 등에 업은 아버지가 보였고, 끈 끊어진 소를 찾아 되돌아가는 여자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왕자의 이름보다 어느 나루가 열렸는지를 먼저 물었다. 아린드라는 아는 길만 말하고, 안전을 확인하지 못한 길에는 표시를 해 주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서는 적이 독을 풀었다는 소문 때문에 우물이 흙으로 막혀 있었다. 아린드라는 남은 물의 냄새를 맡고 그릇 바닥을 살폈다. 독을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흙 아래 샘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반나절을 써서 사람들과 우물을 팠다. 맑은 물이 고이자 끓인 물을 자신이 먼저 조금 마셨다.

타라는 물었다.

“이러다 늦으면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늦었어. 더 늦추고 갈 수는 없어.”

그 말이 늘 옳을 수는 없었다. 우물을 다시 쓰게 만든 뒤 그들은 밤길을 달려야 했다. 말 하나가 다리를 절었고 약품 자루 하나가 진창에 빠졌다. 자루를 건졌을 때 붕대 절반이 젖어 있었다. 아린드라는 쓸 수 있는 것과 버릴 것을 달빛 아래 직접 나눴다. 자기가 고른 일의 값은 다른 사람에게만 치르게 할 수 없었다.

나흘 뒤, 북쪽 나루를 돌아가던 피란민 무리를 적의 정찰 기병 여덟이 따라붙었다. 아린드라는 수레를 버리고 달아나라는 말을 하려다가 지형을 보았다. 왼쪽은 낮은 제방, 오른쪽은 수확이 끝난 밭이었다. 제방 아래에는 비를 받은 수로가 있었다.

그는 수레 두 대를 비스듬히 세워 길을 좁히고 바퀴 아래에 돌을 괴었다. 피란민들에게는 수로 건너 갈대밭에 엎드리라고 했다.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은 셋이었다. 왕자를 포함해서였다. 아린드라는 가장 가까이 올 때까지 쏘지 말라고 했다.

첫 화살은 빗나갔다. 아린드라의 손이 얼어 있었다. 다라세나의 목검 아래서는 이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말의 땀과 두려워하는 사람의 냄새. 화살이 흙에 박히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기병들이 그 소리를 듣고 속도를 높였다.

두 번째 화살은 앞선 기병의 방패에 박혔다. 기병들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오른쪽으로 돌아온 둘은 물기 많은 수로에 발을 빠뜨렸다. 왼쪽의 둘은 제방을 올라오느라 속도가 줄었다.

그 사이 피란민들이 아이부터 건넜다. 타라는 건넌 사람의 수를 세며 반대편에서 손을 흔들었다. 노인 하나가 신을 물에 빠뜨리고 돌아가려 하자 그녀가 팔을 잡아끌었다. 신 한 짝을 찾는 동안 뒤의 아이 셋이 건너지 못할 터였다.

아린드라는 마지막 수레 곁에 남았다. 적 하나가 내려서 칼을 들고 달려왔다. 왕자는 목검에서 배운 대로 옆으로 비켰지만, 피로한 발이 수레바퀴에 걸렸다. 상대의 칼이 팔을 긁었다. 베인 곳보다 먼저 뜨거운 것이 소매 안으로 흐르는 감각이 왔다.

타라가 던진 흙자루가 적의 무릎을 쳤다. 그녀는 이미 수로를 다시 건너와 있었다. 아린드라는 왜 돌아왔느냐고 물을 틈도 없이 겨우 일어나 상대를 넘어뜨렸다. 검끝을 겨눴을 때 그 병사는 왕자보다 어려 보였다. 턱에는 수염이 듬성했고, 칼을 쥔 손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칼을 버려라.”

상대가 알아듣지 못했다. 아린드라는 자기 빈손을 보여 주고 다시 손짓했다. 병사의 시선이 떨어진 칼과 달아나는 동료 사이를 오갔다. 아린드라가 한 걸음 물러서자 그제야 칼을 놓았다.

나머지 기병들이 물러난 뒤 타라는 그의 팔을 묶었다.

“배운 게 다 되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나도 그랬어.”

왕자는 포로에게 물을 주었다. 그 병사는 마시기 전에 말을 가리켰다. 말도 목이 말랐다는 뜻이었다. 아린드라는 물통을 하나 더 가져오게 했다. 포로의 손은 묶되 물통을 들 수 있을 만큼 앞에 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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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북쪽, 열 해

열 해 전, 열아홉의 왕자가 북쪽 창고에 점을 찍고 여왕에게 불려 간다.

북쪽 나루의 점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북쪽 나루의 점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그 나루가 점 하나로만 있던 때, 왕자는 열아홉이었다.

말라바의 중심 도시 다샤푸라, 그곳의 궁전에는 비가 새는 방이 하나 있었다. 왕자는 그 방을 서고로 골랐다. 물이 떨어지는 곳마다 그릇을 놓고, 그릇을 비울 때마다 책장을 넘겼다. 신하들은 그가 나라의 지붕보다 책의 마른 모서리를 더 걱정한다고 수군거렸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서고지기는 바닥에 마른 모래를 뿌렸다. 타라는 젖은 장부 사이에 얇은 천을 끼우고, 아린드라는 글씨가 번지기 전에 숫자를 옮겼다. 곰팡이 냄새와 등잔 기름 냄새가 섞인 방에서 그는 북쪽 마을들의 우물 깊이를 서로 맞추어 보았다. 같은 해인데도 물이 줄어드는 시기가 한 달씩 달랐다.

“이 장부는 세금 기록입니다.”

타라가 낮게 말했다.

“세금을 못 낸 이유도 기록이지.”

아린드라는 납부하지 못한 집 옆에 찍힌 표식을 따라갔다. 소가 죽은 집, 우물이 마른 집, 나루의 창고가 비어 곡식을 빌린 집. 숫자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지도에 놓으면 북쪽으로 이어졌다.

므리날리니 여왕은 그 말을 듣지 않은 척했다. 남편이 죽은 뒤 열두 해 동안 그녀는 직접 국경의 봉화를 살피고 창고의 곡식을 세었다. 어린 아들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반역자들의 이름을 읽던 날도 있었다. 이제 아린드라는 열아홉이었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을 나이는 지났지만, 어머니가 정한 하루에서는 아직 내려오지 못했다.

여왕이 정한 그의 아침에는 활쏘기, 말 타기, 군례가 차례로 들어 있었다. 아린드라는 활쏘기에는 늦지 않았으나 군례가 끝나기 전에 사라지곤 했다. 보고서를 받던 므리날리니는 빠진 시간까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밤마다 어디에서 목검을 드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늘도 훈련장에 가지 않았느냐.”

여왕이 들어왔을 때 아린드라는 해묵은 수로 장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책을 덮지 않았다.

“북쪽 저수지가 예전보다 빨리 마릅니다.”

“물을 묻지 않았다.”

“물 없이는 군마도 못 움직입니다.”

아린드라는 장부를 돌려 보여 주었다. 북쪽 저수지의 준설 인원은 해마다 줄었는데 곡식을 보냈다는 기록은 그대로였다. 여왕은 숫자를 훑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장부가 틀렸다면?”

“그래서 사람을 보내 확인해야 합니다.”

“맞다면?”

“군마보다 먼저 그곳 사람들이 떠날 겁니다. 빈 나루는 누구든 차지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더 화가 났다. 아들이 맞는 말 뒤에 숨어 대답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창밖에서는 다라세나 장군의 군사들이 창을 맞추었다. 쇠붙이 부딪는 소리가 서가까지 닿았다. 아린드라는 그 소리가 잠깐 멎는 순간을 들었다. 사람 하나가 넘어지고, 누군가 웃다가, 장군의 고함에 다시 조용해졌다.

므리날리니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 죽은 뒤 처음 열린 군사 회의에서 장군들은 그녀가 병사 이름을 모를 것이라 여겼다. 그녀는 부상자 명부를 가져오게 해 한 사람씩 가족과 봉급을 물었다. 그 뒤로 누구도 여왕 앞에서 병력을 둥근 수로만 말하지 못했다. 아들에게도 그런 무게를 가르치고 싶었다.

“칼을 다루지 못하는 왕은 남의 칼에 나라를 맡긴다.”

“칼을 다루는 것만 아는 왕도 그렇습니다.”

여왕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왕에게 말했으면 불경한 대답이었다. 어머니에게 말했으면 아픈 대답이었다. 어느 쪽으로 처벌해야 할지 정할 수 없었다.

“그 남의 칼을 누가 쥐었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장부를 봅니다.”

“장부는 네 명령을 듣지 않는다.”

“사람도 명령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빗물이 놋그릇에 떨어졌다. 한 방울씩 일정하던 소리가 두 사람의 말이 끊긴 사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때 문밖에서 서고지기의 딸 타라가 들어왔다. 젖은 책을 옮기던 그녀의 소매에는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왕자님, 북쪽 장부의 마지막 권입니다.”

여왕은 책 밑으로 삐져나온 작은 쪽지를 보았다. 낮은 성문, 빈 창고, 우물 여섯. 아린드라가 직접 그린 지도였다.

지도에는 나루에서 다샤푸라까지 말이 쉬어 갈 곳도 표시되어 있었다. 두 곳에는 먹물을 긁어 낸 흔적이 났다. 이미 폐쇄된 역참이었다. 여왕은 아들이 궁전을 벗어나지 않고도 길의 빈 곳을 찾아냈다는 데 놀랐고, 그것을 자신에게 먼저 보이지 않았다는 데 노했다.

“누가 이것을 시켰느냐.”

“아무도요.”

“그럼 이 숫자는 누가 확인했지?”

“나루의 세금 문서와 마부들의 사료 장부를 맞췄습니다. 다라세나 장군의 행군 기록도 빌렸고요.”

“장군이 내 허락 없이 내주었느냐.”

아린드라는 잠깐 타라를 보았다. 타라가 책임을 나누어 지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가 먼저 말했다.

“제가 돌려놓겠다고 약속하고 가져왔습니다.”

그 말은 여왕에게 자랑처럼 들렸다. 그러나 아린드라에게는 부탁이었다. 한 번쯤은 시키지 않은 일을 보아 달라는 부탁.

여왕은 장부를 돌려주었다. 아린드라의 왼손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활을 당기는 자리와 닮았지만,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쓸린 자국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지도를 압수할 수도 있었다. 대신 우물 하나를 손끝으로 눌렀다.

“여섯이라 적었는데 장부에는 다섯이다.”

“하나는 버려진 절 우물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직 씁니다.”

“대전에서는 장부 밖의 우물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내일 해 뜨기 전에 대전으로 와라.”

여왕이 나간 뒤 타라는 빗물을 받은 그릇을 비웠다. 문이 닫히자 아린드라는 굳은 왼손을 폈다. 어젯밤 목검에 맞은 손목이 푸르게 부어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벌입니까?”

아린드라는 대답 대신 지도에 작은 점을 찍었다. 북쪽 나루의 지붕이 없는 창고였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곳은 사람이 자면 안 돼.”

“대전에 가져갈 지도인데 보내도 됩니까?”

“장군이 먼저 봐야 해. 지붕 없는 창고에 군량을 쌓았으면 비 한 번으로 없어지니까.”

그는 지도를 접어 다라세나 장군 앞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접힌 선이 북쪽 나루의 점을 지나지 않도록 손톱으로 자리를 잡았다. 타라는 왕자의 얼굴을 보았다. 장난도 자랑도 없었다. 책을 읽는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비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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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 북쪽, 열 해

왕자가 왕국을 떠난 지 열 해 뒤, 북쪽 요새에 코끼리가 도착한다.

코끼리가 오는 밤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코끼리가 오는 밤 장면을 인도 세밀화풍으로 그린 삽화

아린드라 왕자가 왕국을 떠난 지 열 해가 지났다. 그가 지도에 찍어 두었던 북쪽 나루는 이제 적의 길이 되어 있었다.

말라바 북쪽 변경의 작은 요새에 처음 도착한 것은 군대가 아니라 먼지였다. 성루의 병사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을 때, 먼지 아래에서 둥근 등이 움직였다. 열두 마리의 코끼리가 간격을 두고 걸어오고 있었다.

망을 보던 병사는 종을 세 번 치고 한 번 쉬었다. 기병이 아니라 큰 짐승이라는 신호는 따로 없었다. 당직 장교가 올라와 손차양을 했다. 바람이 바뀌자 마른 풀 냄새와 함께 짐승의 축축한 냄새가 성벽까지 밀려왔다. 성 아래 나루에서는 뱃사공들이 밧줄을 끊고 마지막 배를 남쪽 물살로 띄웠다.

“밧줄을 내려라. 아이부터 올린다.”

성벽의 도르래가 삐걱거렸다. 올라온 사람은 열일곱이었고, 문밖에 남은 사람은 그보다 많았다. 먼지가 강둑을 덮기 전에 밧줄을 거두어야 했다.

후나계 군벌의 수장 바흐람은 북서쪽의 여러 세력이 다투는 동안 자기 군대를 모았다. 그의 진영에는 먼 초원에서 온 기병도, 오래전부터 인도에 살던 창병도 있었다. 빚 때문에 고용된 병사들이 다른 말로 욕을 하며 같은 물통을 돌렸다. 바흐람이 원하는 것은 여왕의 왕관보다 먼저 다샤푸라의 곡식과 통행세였다.

그는 포로로 잡은 관리에게 성문 앞에서 외치게 했다.

“문을 열면 목숨을 보전한다.”

관리의 입술은 터져 있었다. 그는 같은 말을 두 번 외친 뒤 성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이름을 말할 기회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지휘관은 활을 내리게 했다. 포로를 쏘지 않는 것이 구할 방법은 아니었으나, 바흐람의 말을 대신했다는 이유로 죽이지는 않으려 했다.

성 안의 지휘관은 대답 대신 봉화를 올렸다. 바흐람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첫 공격은 실패했다. 마른 해자에 박아 놓은 말뚝 때문에 코끼리가 멎었다. 성 위에서 돌이 떨어졌고, 한 기수가 어깨를 맞아 내려왔다. 바흐람의 공병들이 방패 아래로 들어가 말뚝을 뽑고 흙자루를 던졌다. 밤새 해자의 한 부분이 메워졌다.

성 안에서도 아무도 자지 못했다. 대장장이들은 화살촉을 다시 펴고, 부엌 사람들은 물에 소금을 풀어 성벽으로 날랐다. 다친 병사는 자기 몫의 물을 마시지 않고 해자 쪽을 가리켰다.

“저기, 같은 곳만 메웁니다.”

지휘관은 횃불을 가리게 했다. 어둠 속에서 흙자루가 떨어지는 둔한 소리를 세어 보니 공격로는 하나가 아니었다. 적은 가장 깊은 곳을 메우는 척하며 문 가까운 말뚝부터 뽑고 있었다. 성 안의 돌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돌을 두 군데로 나누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절반을 다시 성문 위로 돌렸다.

새벽에는 북소리가 달라졌다. 맨 앞의 코끼리 이마에는 두꺼운 가죽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등에 탄 궁수가 성 위를 향해 화살을 보냈다. 아래에서는 보병들이 젖은 가죽을 씌운 큰 방패를 들어 기수의 옆을 가렸다.

코끼리가 성문에 이마를 댔다. 처음에는 문이 버텼다. 두 번째 충격에 쇠고리가 나무 안으로 파고들었다. 세 번째에는 문 뒤의 받침목이 길게 갈라졌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손으로 나무를 밀었다. 자기 힘이 코끼리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떼지 못했다.

옆의 병사가 그의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그제야 손바닥에 박힌 나무 가시가 빠지며 피가 났다. 둘은 두 번째 받침목을 걸려고 했지만 홈이 충격으로 비틀려 들어가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코끼리의 숨이 풀무처럼 새어 들어왔다. 기수가 내는 짧은 구령과 짐승의 발톱이 돌을 긁는 소리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렸다.

문이 터졌을 때 소리는 오히려 짧았다.

깨진 문짝이 바닥을 쓸며 밀려왔다. 코끼리 발이 그 위를 밟았고, 뒤따르던 창병들이 좁은 틈으로 쏟아졌다. 성벽 한쪽에서는 비에 약해진 흙과 돌이 공병의 지렛대 아래 무너졌다. 큰 짐승의 어깨가 밀어 올린 먼지 속으로 깃발이 사라졌다.

봉화를 지키던 소년은 불씨를 항아리에 담아 뒷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휘관은 그에게 다샤푸라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항아리를 품에 넣었다. 남문 밖 비탈에는 아직 적이 닿지 않은 염소 길이 있었다.

“불씨 말고 본 것을 가져가라. 코끼리 수, 공병의 방패, 기병이 향한 길.”

소년은 열두 마리라고 되뇌었다. 지휘관은 성 안에 남은 사람의 수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확인하지 못한 수를 전하면 소식이 아니라 희망이나 공포가 될 뿐이었다.

도망친 전령은 사흘째 되는 밤 다샤푸라에 닿았다. 므리날리니는 젖은 망토도 벗지 않은 그를 의자에 앉혔다.

“얼마나 남았느냐.”

전령은 군사의 수를 말하려 했다. 여왕이 다시 물었다.

“성 안 사람들 말이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령의 무릎에서 마른 진흙이 떨어졌다. 시종이 물을 내왔지만 그는 잔을 잡지 못했다. 손가락이 사흘 동안 고삐를 쥔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므리날리니는 직접 잔을 받쳐 주었다. 물을 삼킨 뒤에도 그는 마지막으로 본 성문의 모습을 말하지 못했다.

여왕은 서기관에게 새 장부를 펴게 했다. 전령이 코끼리가 지나간 간격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자 서기관은 막대 열둘을 그어 수를 맞추고, 젖은 가죽의 가림막과 기병이 향한 길은 다른 줄에 옮겼다. 생존자 수를 묻는 칸에서 펜이 멎자 여왕은 그 자리에 봉화를 마지막으로 본 시각만 적으라고 했다. 전령은 떨리는 손으로 그 줄 아래에 자기 표식을 남겼다.

여왕은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꺼냈다. 돌아오라고 쓰려다가 펜을 멈췄다. 자유를 약속했으니 소식을 숨겨야 하는가.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아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겨 두는 일이었다.

그녀는 요새가 함락되었다고 썼다. 적군의 규모와 진로,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까지 적었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다오.’

먹이 마르는 동안 그녀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왕자를 부르는 어머니의 말인지, 흩어진 병력을 모아야 하는 여왕의 말인지 스스로도 가를 수 없었다. ‘서둘러라’라고 썼다가 지웠다. 지운 자리에 종이 섬유가 일어나 손끝에 거칠게 걸렸다.

그 뒤에는 명령을 덧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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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바의 여왕 므리날리니와 아들 아린드라가 둔 대국, 열 해 뒤 다샤푸라를 덮친 전쟁, 그리고 두 사람의 기록이 페르시아와 동쪽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입니다.

자유를 약속한 어머니는 돌아오라는 명령 대신,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만 편지에 적습니다.

열아홉의 아린드라는 어머니와의 대국에서 이긴 뒤 궁을 떠납니다. 열 해 후 북쪽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그는 다샤푸라로 돌아옵니다. 두 사람이 둔 판의 기록은 전쟁이 끝난 뒤 페르시아와 동쪽으로 건너가 서로 다른 놀이와 만납니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창작이며, 차투랑가와 체스, 장기가 전해진 역사적 흐름은 사실과 창작을 구분해 서술했습니다.

책으로 읽기 https://queensmove.thinktree.kr

기 · 북쪽, 열 해

북쪽 요새가 무너진 뒤, 열 해 전 아린드라가 궁을 떠나게 된 대국의 시작을 따라갑니다.

01. 코끼리가 오는 밤 https://thinktree.kr/posts/507
02. 북쪽 나루의 점 https://thinktree.kr/posts/508
03. 돌아오는 길 https://thinktree.kr/posts/509
04. 여왕의 조건 https://thinktree.kr/posts/510
05. 다샤푸라의 포위 https://thinktree.kr/posts/511

승 · 성문과 판

다샤푸라의 성문이 무너지는 동안, 여왕과 왕자가 서로 전차와 보병을 내주었던 대국의 결말이 드러납니다.

06. 새벽의 작은 판 https://thinktree.kr/posts/512
07. 무너진 성문 너머 https://thinktree.kr/posts/513
08. 전차를 내준 수 https://thinktree.kr/posts/514
09. 코끼리 부대의 새벽 https://thinktree.kr/posts/515
10. 보병을 내준 수 https://thinktree.kr/posts/516

전 · 내준 수

전쟁이 끝난 뒤 므리날리니는 왕관을 벗고, 타라가 엮은 대국의 기록은 상인의 짐에 실려 페르시아로 향합니다.

11. 책에 없는 승리 https://thinktree.kr/posts/517
12. 성문 밖의 첫날 https://thinktree.kr/posts/518
13. 왕관을 벗는 손 https://thinktree.kr/posts/519
14. 열 해의 첫 편지 https://thinktree.kr/posts/520
15. 페르시아로 가는 사본 https://thinktree.kr/posts/521

결 · 판이 떠난 뒤

서쪽과 동쪽으로 갈라진 판의 기록이 여러 규칙과 만나고, 마침내 뉴욕에서 체스와 장기가 나란히 놓입니다.

16. 동쪽 판에는 강이 있었다 https://thinktree.kr/posts/522
17. 강을 지운 장기판 https://thinktree.kr/posts/523
18. 여왕이 멀리 달리던 시대 https://thinktree.kr/posts/524
19. 바다 건너의 두 판 https://thinktree.kr/posts/525
20. 다음 수를 고르는 사람 https://thinktree.kr/posts/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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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남은 한 마리

베르나르를 잃은 마르탱이 남은 큰 늑대를 쫓겠다고 하고, 그 늑대는 다시 민가로 내려와 사람을 죽인다.

베르나르는 고향인 라베세르생마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시신을 그곳까지 실어 갈 수레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산기슭 빈집 뒤편,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비탈에 노인을 묻고 돌을 쌓았다. 잔은 무덤 앞 나무판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르말지외에서 마련한 나무판에는 그 마을 사람들의 이름만 올렸고, 베르나르는 그곳 사람이 아니었다. 마르탱은 돌을 쌓는 동안 노인의 총을 무덤 곁에 두었다. 그러나 떠날 때는 그 총도 자신의 총과 함께 챙겼다. 남은 늑대를 쫓으려면 총이 한 자루라도 더 필요했다.

“오늘부터 놈을 쫓겠습니다.” 마르탱이 말했다. “이제 한 마리만 남았습니다. 영감을 할퀸 놈은 죽었고, 문간을 빠져나간 놈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잔은 숯으로 자국을 그린 종이를 펼친 채 들고 있었다. “베르나르를 죽인 두 번째 늑대는 죽었습니다. 왕의 사냥꾼이 잡은 작은 늑대도 오래전에 치웠고요. 그 뒤에 새로 확인한 것은 가장 큰 놈의 발자국뿐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보지 못한 늑대가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움직이려면 어느 놈을 쫓을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그러다 당신까지 베르나르처럼 죽으면, 뒤를 이을 사람이 없습니다.”

베르나르를 죽인 늑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마르탱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산속에서 보았던 거대한 등을 떠올릴 때마다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늑대까지 죽여야 비로소 노인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작 복수를 마친 뒤 무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잔이 거듭 경고했지만, 마르탱은 기어이 큰 늑대를 쫓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산 아래의 또 다른 집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번 희생자는 물을 길으러 나온 여자였다. 양들은 무사히 우리 안에 있었고, 물통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여자의 시신은 개울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늑대가 끌고 가지는 않은 것이다. 몸에 남은 발톱 자국은 전날 죽은 늑대가 낸 것보다 훨씬 넓었다. 잔은 그 간격을 재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죽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눈앞의 사람을 보며 상처의 너비부터 헤아리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피에르가 달려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뒤 모자를 벗었다. “마리가 죽은 뒤로는 줄곧 문간만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집 여자는 문밖 개울가에서 당했군요.”

마르탱이 여자의 이름을 묻자 피에르가 가르쳐 주었다. 마르탱은 잊지 않으려는 듯 그 이름을 소리 내어 한 번 되뇌었다. 이 죽음 또한 복수해야 할 까닭이라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베르나르를 잃었을 때만큼 슬픔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노인은 바로 그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탱은 자신이 제때 막지 못해 이 여자까지 죽었다고 자책했다. 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 늑대의 발자국이 전보다 집 가까이까지 들어왔습니다.” 잔이 말했다. “두 번째 늑대가 죽은 뒤부터 이러기 시작했어요.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건 사람이 또 죽었다는 사실뿐입니다.”

마르탱은 개울가에 깊이 찍힌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죽은 늑대를 코로 밀며 그 둘레를 맴돌던 자국과 달리, 이번 발자국은 집의 담장을 향해 곧장 뻗어 있었다. 그는 총을 집어 들었다.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발자국을 쫓겠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또 물을 길으러 나온 사람이 당할 겁니다.”

잔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말려 보았자 베르나르가 남긴 당부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유언을 따라 하루 동안 늑대를 쫓지 않았지만, 그사이 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저녁이 되자 산 아래에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장례를 치르느라 피운 것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근 사람들이 두려움을 달래려고 지핀 불이었다. 불가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콜로스라는 별명을 입에 올렸다. 그 말의 뜻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들은 것은 문을 더 일찍, 더 단단히 잠가야 한다는 피에르의 당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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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남은 한 마리

베르나르가 두 번째 늑대를 코앞에서 죽이지만, 자신도 그 발톱에 치명상을 입고 숨진다.

새벽녘, 잔은 개울가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냈다. 왕의 사냥꾼이 죽인 늑대의 것보다는 컸지만, 문간을 빠져나간 놈의 것보다는 작았다. 베르나르가 말한 개울가의 늑대가 분명했다. 발자국은 한 마리의 것뿐이었다. 잔은 그 자국이 가장 큰 발자국과 겹치지 않는지 두 번이나 확인했다.

“이놈입니다. 콜로스는 아니에요.” 잔은 그 별명을 입에 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큰 놈은 어젯밤 이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르는 손으로 마르탱의 총구를 눌러 내렸다.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가까이 가겠다. 이놈이 쓰러져도 큰 놈을 쫓아서는 안 된다. 오늘 잡을 것은 이놈 하나뿐이야.”

노인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덤불 앞까지 다가갔다. 늑대는 개울물을 마시느라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놈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코앞에서 베르나르의 총이 불을 뿜었다. 화약 연기가 노인과 늑대를 한꺼번에 삼켰다. 늑대는 옆으로 고꾸라지면서 앞발을 휘둘러 노인의 가슴과 목을 할퀴었다. 숨이 끊어질 때 일어난 경련인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덤빈 것인지 연기 밖에서는 알 수 없었다. 약속을 어기고 뛰쳐나간 마르탱이 연기 속으로 들어섰을 때, 늑대는 이미 죽어 있었고 베르나르는 제 총 위에 엎어져 있었다.

“쫓지 마라.” 피가 목에 차오른 탓에 노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큰 놈까지 나타나면 너희 둘로는 막지 못해. 개울가의 놈은 내가 쓰러뜨렸다.”

마르탱은 상처를 눌러 보았지만 피를 막을 천이 모자랐다. 잔이 서둘러 겉옷을 찢어 건넸으나, 천은 순식간에 피로 흠뻑 젖었다. 베르나르가 마르탱의 소매를 붙잡았다. 라베세르생마리에서 떨리는 제자의 손을 말없이 이끌어 주던 바로 그 손이었다.

“오늘 당장 복수하겠다고 나서지 마라. 오늘은 시신만 지켜. 큰 놈이 피 냄새를 맡고 찾아오더라도 지켜보기만 해라. 쏘지 마. 한 발로는 놈의 어깨에 상처만 낼 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라베세르생마리의 겨울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못했다. 마르탱이 베르나르의 이름을 한 번 불렀지만, 노인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숨을 거두었다. 두 번째 늑대는 그의 무릎 곁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그렇게 노인과 늑대의 시신이 나란히 놓였다. 죽은 늑대는 콜로스만큼 크지 않았다.

마르탱과 잔은 베르나르의 시신을 가까운 바위 그늘로 옮겼다. 마르탱이 겉옷으로 노인의 얼굴을 덮으려는 순간, 잔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개울 건너편에서 거대한 등이 움직였다.

콜로스는 죽은 늑대에게 다가가 코를 대 보더니 그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주둥이로 옆구리를 밀자 사체가 조금 움직였다. 놈은 물러서서 다시 한동안 지켜보았지만, 피를 핥지는 않았다.

마르탱이 총을 움켜쥐자 잔이 총열을 눌렀다. 두 사람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콜로스는 죽은 늑대 곁에 오래 머물다가 숲으로 돌아갔다. 마르탱은 눈앞까지 다가온 놈에게 끝내 총을 쏘지 않았다. 베르나르가 남긴 마지막 당부를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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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남은 한 마리

베르나르와 마르탱과 잔은 흩어져 움직이고, 늑대를 가까이서 확인한 뒤 한 발씩 쏘기로 한다.

이튿날 아침, 베르나르는 먼저 마르탱의 화약을 살폈다. 라베세르생마리에서 가져온 화약은 습기 없이 잘 말라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칭찬 한마디 하지 않았다. 포수라면 화약을 마른 상태로 간수하는 것이 당연했다.

“여럿이 멀리서 한꺼번에 쏘다가는, 마흔 명이나 되는 그 사냥대처럼 서로를 맞힐 수 있어.” 베르나르가 말했다. “그자들은 화약 연기 속에서 서로에게 총을 쐈지. 우리는 놈을 똑똑히 보기 전에는 쏘지 않는다. 모습을 드러내면 가까이 다가가라. 멀리서 쏘면 기껏해야 어깨에 상처만 낼 뿐이야. 그 정도로는 그 늑대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걸 이미 봤잖느냐.”

마르탱은 예전에도 그런 사격을 배운 적이 있었다. 겨울이 올 때마다 노인은 멀리 세워 둔 과녁을 치우고 코앞에 새 과녁을 놓게 했다. 표적이 가까울수록 곧 달려들 것만 같아 손이 떨렸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도 맞히는 법을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마르탱 곁을 지키며 스스로 익히게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숲에 들어가도 서로 떨어져 움직이겠다고 했다.

“셋이 한 줄로 늘어서면 기병대나 다를 게 없다. 앞사람이 멈추는 순간 뒤가 모조리 막히지. 잔은 흔적을 살피고, 나는 앞을 보겠다. 너는 양옆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라.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한꺼번에 달려들어서는 안 돼. 그러면 그 마흔 명과 다를 게 없으니까.”

잔은 숯으로 자국을 그린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놈들이 한곳에 숨어 지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습격 때마다 한 마리씩만 나타났다고 해서 잠자리까지 하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직접 찾기 전에는 어디가 잠자리라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사람이 죽은 집 주변만 살피지요.”

그들은 최근에 죽은 남자의 집까지 찾아갔다. 르말지외 골목이 아니라 산기슭의 외딴집이었다. 피에르는 마을 끝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그 너머로 따라오지 않았다. 마르탱이 고개 숙여 인사했지만, 피에르는 가지고 온 나팔총을 등 뒤에 감춘 채였다. 괜히 내보였다가 함께 데려가 달라는 뜻으로 비칠까 두려웠다.

사람이 떠난 마당의 진흙에는 깊이 찍힌 큰 발자국과, 그보다 작고 희미한 발자국이 하나씩 남아 있었다. 잔은 작은 발자국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쪽이 먼저 지나갔습니다. 큰 놈은 작은 놈의 자국을 밟지 않았어요. 둘이 나란히 와서 덮친 것은 아닙니다.”

베르나르는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총을 무릎 위에 놓았다. 손은 늙었어도 총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남은 자국 중 하나는 왕의 사냥꾼이 죽인 놈의 것보다 크고, 문간을 빠져나간 놈의 것보다는 작아. 개울가에서 그 늑대를 만나면 내가 가까이 가겠다. 놈을 가장 큰 늑대와 혼동하지 마라.”

“둘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마르탱이 물었다.

“놈이 몸을 일으키면 알 수 있다. 그전에는 쏘지 마라.”

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면 진흙에 남은 두 번째 늑대와 큰 늑대의 자국이 모두 씻겨 나가, 둘을 가려낼 길이 없었다. “오늘은 뒤쫓지 않겠습니다. 줄지어 쫓다가는 서로의 총구 앞에 서게 됩니다. 내일 새벽까지는 이 자국을 남긴 놈이 어디서 물을 마시는지만 확인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사선에 들지 않도록 넉넉히 떨어진 채, 해가 기울 때까지 번갈아 개울가를 지켜보았다. 저녁이 되자 베르나르는 화약통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가까이서 쏜다고 사수가 무사히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늑대만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쓰러뜨려야 해. 내가 쓰러뜨리지 못하면 네가 쏴라. 먼저 놈의 앞을 막는 건 내가 하겠다.”

마르탱은 대답하는 대신 노인의 총열을 닦아 주었다. 잔은 오늘 살핀 개울과 발자국 사이의 거리를 종이에 적었다. 베르나르는 깨끗해진 총을 받아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모두 잠들 때까지 홀로 불가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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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남은 한 마리

잔은 작은 발자국이 큰 발자국을 뒤따르다가 개울 앞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종이에 옮긴다.

산 아래 빈집의 탁자에는 총보다 종이가 더 많이 놓여 있었다. 베르나르는 창가에 서서 화약이 눅눅해지지 않았는지 살피고 있었다. 마르탱이 들어오자 영감은 고개만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으며 반가워할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늦었구나.” 베르나르가 말했다.

“제가 도착하기도 전에 토벌이 끝났다는 고지문이 붙었습니다.”

“짐승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토벌이 끝났다는 고지부터 붙이는 법이지.”

탁자 맞은편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종이 위에는 잉크 대신 숯으로 그린 발자국들이 줄지어 있었다. 베르나르는 여자의 이름이 잔이라고만 짧게 소개했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베르나르도, 잔도 밝히지 않았다. 잔은 마르탱의 신발을 한번 훑어본 뒤 종이 한쪽의 빈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앉지 마십시오. 발자국을 대조하려고 비워 둔 자리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잔은 종이 왼쪽에 작은 발자국을 그렸다. 오른쪽에는 피에르의 발을 넣고도 자리가 남을 만큼 큰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 작은 발자국은 큰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개울 앞에서 옆으로 갈라졌다.

“데느발 영감은 한 마리가 앞발과 뒷발로 남긴 자국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탱이 말했다.

“그분은 발자국보다 사냥개를 믿었지요.” 잔이 대답했다. “개들은 물가에서 냄새를 놓쳤지만, 흙에는 발자국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건 한 마리의 앞발과 뒷발 자국이 아닙니다. 적어도 두 마리입니다. 어쩌면 셋일 수도 있고요. 그렇다고 지금 셋이라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기록해 버리면 아직 확인하지도 못한 세 번째 늑대의 존재까지 사실로 굳어질 테니까요.”

문간에 선 피에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잔은 그를 안으로 불러, 그날 본 짐승의 어깨너비를 두 팔로 나타내 보라고 했다. 피에르는 머뭇거리며 팔을 벌렸다. 잔은 그 너비를 가늠한 뒤 종이에 그린 큰 발자국 옆에 점을 찍었다.

“문간을 빠져나간 놈은 레샤즈에서 죽은 늑대와 다릅니다. 죽은 늑대의 어깨는 여기까지였지만, 당신이 보여 준 너비는 이 선에 더 가깝습니다.”

잔은 숯을 내려놓았다. “이 발자국을 보면 어느 늑대가 다른 늑대를 뒤따랐다는 것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왜 따라갔고, 또 왜 중간에 다른 길로 빠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베르나르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두 마리든 세 마리든, 왕실이 한 놈을 죽인 뒤에도 사람이 계속 죽고 있어. 놈들은 양이 아니라 사람을 노리지. 우리는 떼로 몰려다니지 않을 게다. 놈들도 무리를 지어 덤빈 적은 없으니까. 문간으로 들어온 짐승은 언제나 한 마리였어.”

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나타난 짐승은 한 마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매번 나타난 놈이 같은 늑대였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마르탱은 라베세르생마리에서 가져온 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총을 놓으면 종이에 그린 발자국이 가려질 터였다. 그는 피에르에게 들은 ‘콜로스**’라는 말을 잔에게 전했다. 잔은 그 말을 발자국 옆에 받아 적지 않았다.

“콜로스는 그저 크다는 뜻으로 붙인 별명입니다. 그 말만으로는 실제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저녁이 되자 세 사람은 문을 걸어 잠그고 등불의 불꽃을 낮췄다. 잔이 그린 작은 발자국은 큰 발자국을 뒤따르다가 개울 앞에서 끊겨 있었다. 그 뒤 작은 늑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추측으로 결론짓지 않았다. 잔은 지금까지 확인한 발자국만 보고 내일 어느 길을 살필지 정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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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남은 한 마리

승리가 선포된 뒤 라베세르생마리에서 걸어온 마르탱은, 왕실이 죽인 늑대가 문간을 드나든 짐승과 다르다는 말을 듣는다.

고지문이 채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한 남자가 남쪽 길을 걸어 마을로 들어왔다. 말도 없이 총 한 자루만 메고 있었다. 군도도, 사냥개도 없었다. 그는 광장에 도착해 물을 찾기보다 먼저 교회 문을 살폈다. 고지문 한쪽이 떨어져 나간 자리로 나무판에 적힌 이름들이 드러나 있었다.

“베르나르 영감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서기에게 말했다. “라베세르생마리**에서 왔습니다. 영감께서 저보다 먼저 이쪽으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서기는 장부를 뒤졌지만 베르나르라는 이름을 찾지 못했다. “왕실 사냥은 이미 끝났습니다. 사냥꾼도 포상을 받고 돌아갔고요.”

“그분은 왕실 사냥꾼이 아닙니다.”

남자의 이름은 마르탱이었다. 아무도 나이를 묻지 않았고, 그도 먼저 밝히지 않았다. 신발에는 라베세르생마리에서 오는 길에 묻은 흙이 아직도 두껍게 붙어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외지인이라는 사실은 그 신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물통 옆에 있던 피에르가 마르탱을 바라보았다. “늦으셨습니다. 군대도 사냥꾼도 모두 물러났고, 왕실은 토벌이 끝났다고 선포했습니다.”

“영감의 편지에는 딱 한 문장만 적혀 있었습니다.” 마르탱이 말했다. “죽은 늑대는 문간을 빠져나간 짐승과 크기가 다르다고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영감은 어디 계십니까?”

“산 아래 빈집에서 총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알리는 종이 울려도 마을에는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마르탱은 곧장 그 집으로 가지 않았다. 피에르가 먼저 양우리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개울가에 도착한 마르탱은 발자국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피에르의 발을 넣고도 양옆이 남을 만큼 큰 자국이었다. 마르탱은 그 옆에 자기 손을 펼쳐 보았다.

“이 발자국을 남긴 놈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까?”

“죽은 놈은 이것보다 작았습니다. 레샤즈에서 치수를 쟀다고 하더군요. 사체는 왕실로 가져갔습니다.”

마르탱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자국만 들여다보았다.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지는 않았다. “저는 아직 늑대가 한 마리인지조차 모릅니다. 영감도 편지에 모른다고 쓰셨습니다. 다 안다는 듯 떠들려고 온 게 아닙니다.”

피에르는 그날 밤 문간에서 본 일을 들려주었다. 두 사람이 힘겹게 들었던 시신을 짐승은 혼자 물고 갔으며, 자신은 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마르탱은 받아 적는 대신,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이어 빈 안장들과 이끼 위에 버려진 총 이야기도 들었다. 피에르가 ‘콜로스’라는 말을 전했을 때도 뜻을 되묻지 않았다.

“그 말은 영감께 전하겠습니다. 영감이라면 뜻을 아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르실 수도 있고요.”

마르탱은 아델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피에르가 그를 말렸다. “아델에게는 이제 사냥꾼의 물음에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르탱은 남쪽으로 뻗은 길을 한 번 돌아보았다. 먼 길 너머의 라베세르생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산 아래 빈집으로 향했다. 길게 늘어진 그의 그림자가 고지문이 붙은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마르탱은 나무판에 적힌 이들이 누구인지, 어느 집에서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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