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너무 어려서 아버지의 시골 생활을 알지 못한다.
어릴적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고 그 호기심이 여기 저기서 문제를 만들었다.
겨우 심어 놓은 못자리에 들어가서 개구리를 잡는다던지
미역깡에 들어가서 이러 저리 다니다가 다리에 거머리를 한 가득 붙이고 다닌다 던지
뭐 그런 정도의 시골 생활이 기억날뿐
어른들의 생활이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어머니와 크게 다투신건 기억이 난다.
그후로
우리는 대구의 작은 외삼촌이 방적공장으로 크게 성공을 하시자
우리도 고향을 정리하여 그 돈으로 방적기계 몇대를 사고 외삼촌의 방적공장에 합류한 걸 기억한다.
그 때쯤인가 부터 아버지와 작은 외삼촌과의 사이가 멀어지신것 같다.
애초에 아버지는 도시라는 곳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도시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도시와는 상극에 가까운 분이시다.
어머니는 한번 떠난 시골로 다시 돌아가실 생각이 없으셨나 보시다.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문제 투성이었다.
외삼촌은 아버지가 운전을 배워서 가까운 공단에 납품을 하셨으면 하신것 같다.
그때 외삼촌의 공장터는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그 중간에는 큰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 넓은 공장터 한쪽에 공장이 있었지만 공장 또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 넓은 땅에서 외삼촌은 공장명의의 작은 트럭을 사고 운전연습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었다.
하지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그차를 물 웅덩이에 빠트리고는 어디로 사라지셨다.
뒷 수습은 늘 다른 사람의 몫이 었다.
그쯤해서 아버지와 외삼촌의 갈등이 생겼다.
삼교대 밤시간에 불량률이 많았고
아버지의 약한 마음에 여공들이 조는 것에 제동을 가하지 못했다.
결국 일은 틀어져서 아버지는 외삼촌과 등을 졌다.
외삼촌의 사업은 문제가 발생했고 덩그란 땅에 어머니 명의의 방적기 몇대만 남고 모두 채권자들 손에 넘어 갔다.
수 년뒤 외삼촌은 지병이신 강경화로 세상을 떠나셨다.
사실 누구의 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버지가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도 어리다.
나이가 어리다고 세상의 혜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경험이란 그런 하나 하나의 잘못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서 나아가는 것이기에
그때의 아버지는 어리고 어린 나이였다.